장기의 묘수와 훈수

최보규 기자 | choibg999@hanmail.net | 입력 2018-03-05 10: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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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의 묘수와 훈수

 

 

▲ 최보규 인제대 교수
[K스포츠장기= 최보규] 장기를 두는 풍경은 옛날 시골 장터나 길모퉁이 등지에서는 흔히 보아왔던 풍경이었다. 그 중에 묘수풀이 문제인 박보를 내어놓고 상행위를 하는 모습은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언뜻 보면 장기의 초보자라도 서너 수만 두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문제여서 너나 할 것 없이 선선히 거금을 걸고 박보를 대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묘수 문제들은 유단자급 전문기사들도 풀기 어려운 20수 전후의 복잡한 문제들이었다. 옆에서 훈수를 하는 바람잡이들도 한패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장기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은 이들의 상행위를 근절하고 우리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훈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예전에 TV에 장기 훈수를 하다가 말다툼을 하고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와 실소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공식적인 대국이 아닌 다음에야 장기판 옆에는 구경꾼들이 꼭 붙게 마련이다. 이들이 점잖게 구경만 하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한국 사람들이 참견 좋아하는 민족이라면 굳이 그 이유도 되겠지만 장기판 옆의 훈수꾼들은 직접 두는 사람보다 더욱 재미를 가지고 보게 되므로 한참 훈수를 하다보면 마치 자신이 장기를 두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마련이다.

또한, 이들은 항상 약자의 편을 드는 일이 많아 장기 형태가 좋아 다 이겨 놓은 장기를 망쳤다고 화를 내고 멱살을 잡고 싸우기까지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기야 군자도 훈수는 참지 못한다고 했으니, 옛 만담에 도둑질하러 들어간 도둑이 문틈으로 벌어지는 장기판에 넋을 잃고 훔쳐보다가 훈수하던 버릇이 나와 입을 참지 못하고 그만 "저 차, 저 차!" 하다 잡혔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또 이런 대화도 오간다. 자네, 아들을 잘 두었다는데 어느 정도인가 ?

뭘, 장기판에서 훈수 안 할 정도는 가르쳐 놓았네.

예의를 꼭 지켜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훈수하는 모습은 꼭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장기를 두는 사람은 두는 사람대로, 구경꾼들은 구경꾼들대로, 훈수하는 사람은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꼭 얼굴을 붉히며 싸워야 할 이유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유구한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때묻지 않은 장기,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었기에 훈수하는 사람들조차 밉지 않았던 장기는 마치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어느덧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힌 우리만의 숨결이 아니겠는가 싶다.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바닷가만을 그릴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대는 초저녁 널찍한 평상 위에 속옷 차림으로 앉아서 얼음을 띄운 수박 화채 한 그릇 마시며 장기판을 앞에 놓고 신선 놀음을 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또한 기나긴 겨울의 깊은 밤을 멀리서 찾아온 오랜 친구와 장기판을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려지는 것은 우리내 삶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장기를 두면서 더위를 잊어 보는 것은 꽤나 지혜로운 휴가를 즐기는 방법이고 아들과 함께 장기 한판을 놓아보는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어느덧 훌쩍 자라버린 아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대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장기는 우리 민족 사랑방의 역사이며 우리 놀이 문화의 역사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장기는 변하지 않고 꿋꿋하게 한쪽 벽 구석에 서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을 질시하듯 지켜보았다. 아버지께서도 두셨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도 두셨던 그 장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옛날 사랑방에서 동네 어르신들과 “장군아” “멍군아”를 외치던 할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그 장기를 지금 우리가 두고 있는 것이다. 각종 문명의 발달로 이루어진 이름 모를 서양의 스포츠들이나 오락들을 멋모르고 닥치는 대로 수용하여 희희낙낙하고 있는 동안 우리 전통 문화가 서서히 잠식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의 것을 아끼고 찾자는 의미에서도 우리의 전통 문화는 지켜지고 가꾸어져야 한다.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을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고 경시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장기는 남한에서만 1천만을 훨씬 넘는 애호가들을 보유하고 있는, 가히 대중적인 서민 오락이다. 우리 인구의 4분의 1이 장기를 둘 줄 안다는 것이니 이는 보급률에 있어서도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우리의 놀이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길 때는 즐기면서도 천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대중적인 놀이니 만큼 가장 아끼고 사랑받는 우리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놀이 문화와 그 역사를 같이하는 장기, 한국장기 단체의 전문기사들이나 장기를 사랑하는 모든 애호가들이 장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 고유의 오락 문화인 장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는 바둑에 비하여 수가 퍽 적다고 생각한다. 바둑은 두면서 판을 채워나가는 것이고 장기는 두면서 판을 비우면서 기물의 움직임은 한층 더 가속도가 붙어나가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면 장기의 수는 바둑에 비하여 결코 적지 않다. 장기를 두면서 바른 예의를 지키고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격려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멋진 묘수를 둘 때는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경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장기를 멋지게 두는 모습이다.

 

최근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장기 동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의를 망각한 행동으로 상대방에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장기는 어디까지나 오락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오락은 어디까지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패자는 “한 수 잘 배웠습니다.”라고 승자의 손을 잡아주고 승자는 “제가 운이 좋아서 이긴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패자를 격려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다.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상대방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마음이야말로 멋진 묘수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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